(보이스피싱범에게 계좌정보를 제공하는 등으로서 범행을 용이케 하였다는 공소사실에 대하여 금융실명법 위반 방조 혐의로 약식명령을 받고 정식재판청구를 하였으나 종전 벌금형의 10배로 증형된 사례에 대한 이견)
1. 사실관계
피고인 A는 성명불상자인 보이스피싱범 B로부터 ‘당신의 계좌로 자금을 입금하여 거래실적을 올려 저축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주겠다’는 취지의 말을 듣고 이를 믿고 자기 명의의 계좌와 연결된 통장을 사진 촬영하여 B에게 보내주었는데 B는 이후 위와 같은 경위로 알게 된 A의 계좌정보를 이용하여 C를 상대로 보이스피싱 사기를 범해 편취금 500만원을 위 계좌로 송금하게 하였고, 이후 A는 B의 지시에 따라 위 돈을 인출하여 그로써 백화점 상품권을 구매한 다음 B가 지시하는 사람을 만나 위 상품권을 전달하였다. A는 위 사건의 경위 중 ‘B에게 B의 탈법행위를 용이케 할 목적으로 자기 명의의 계좌정보를 제공한 점 및 자기 명의의 계좌로써 B의 사기범죄 피해자 C의 돈을 송금 받은 점’(이하 ‘공소사실’)이 B의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금융실명법’) 위반을 방조한 것이라는 혐의로 벌금 10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았고 이에 불복하여 정식재판을 청구하였다.
2. 적용법조 및 피고인 A의 주장
금융실명법 제6조 제1항, 제3조 제3항은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제3호에 따른 불법재산의 은닉, 같은 조 제4호에 따른 자금세탁행위 또는 같은 조 제5호에 따른 공중협박자금조달행위 및 강제집행의 면탈, 그 밖에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타인의 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한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A는 이 사건에서 자신은 B가 이른바 보이스피싱범으로서 제3자를 기망하여 A의 계좌를 통하여 범죄수익금을 취득할 것임을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는 취지로 방조의 범의를 부인하였다.
3. 판결이유의 요지 및 주문형
대상판결은 공소사실 중 A의 위 B의 행위에 대한 방조 범의의 존부에 관하여, B가 A에게 계좌정보를 구득할 당시 했다는 말은 결국 “허위의 계좌입출금 거래내역을 만들어 이를 진실한 거래내역인 것처럼 금융기관에 제출하여 이에 속은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겠다는 것인데, 이러한 행위는 사기죄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A가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A의 계좌가 이용되는 것을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유 없다.”며 A에게는 B의 탈법행위에 대한 확정적인 인식이 있었다고 판단하였고, 이어 “A의 경력과 연령의 사람이 B의 위와 같은 설명을 듣고 이에 따른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인 점, “(B가 한 말이나 실제로 돈이 송금된 사실 등이) 조금의 사려만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행위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일이 발생하였다면 이에 관한 의문을 품고 타인에게 상의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행동방식”인 점 등에 비추어 B의 탈법행위에 대한 A의 예견가능성 또한 인정된다는 취지로 B의 범의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A의 행위가 B의 범행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점, C등 피해자들의 피해의 크기가 상당한 점, A가 그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들어 종전 약식명령의 벌금은 지나치게 가볍다고도 판단했다. 이에 대상판결은 A에게 종전 벌금형 액수의 10배에 해당하는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4. 검토
가. 유죄판단을 위하여 인정되어야 할 사항
형법은 타인의 범죄를 방조한 자를 종범으로 처벌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제32조 제1항). ① 정범의 실행행위의 가벌성 여하가 공범성립에 선결되어야 하는지 여부의 문제에 관하여 통설·판례는 공범독립설은 배척하고 공범종속설의 입장에 있는바(대법원 1998. 2. 24. 97도183 판결 등), 그 중 종속의 정도에 관한 어느 견해에 따르더라도, 적어도 정범의 실행행위가 적용법조인 처벌규정의 구성요건에 해당함이 인정되어야 방조범을 동 규정의 종범으로 의율 할 수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② 또한 형법은 죄의 성립요소(범죄를 구성하는 각 사실)에 대한 인식, 즉 이른바 ‘고의’가 없는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고(제13조), 따라서 고의의 존부는 구체적 범죄사실과 더불어 확신에 이르도록 증명되어야 할 요증사실에 해당하는 바(형사소송법 제307조 제2항), 위 각 규정은 방조의 경우에도 그 적용이 배제되거나 완화될 이유가 없으므로, 결국 방조범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문제된 범죄사실에 대한 고의가 증명되어야 하는데(한편, 형법은 정상의 주의를 해태함으로 인하여 죄의 성립요소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행위, 즉 ‘과실’로 인한 행위는 법률이 특별히 과실의 경우에도 처벌한다고 규정한 경우에 한하여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나(형법 제14조), 이 사건에 적용되는 처벌규정인 금융실명법 제6조 제1항, 제3조 제3항은 과실범 처벌규정이 없다), 위 방조범의 성립요건으로서의 고의란 ⓐ 자신의 행위로서 정범의 실행을 용이하게 한다는 점에 대한 인식, 즉 이른바 ‘방조의 고의’와 함께 ⓑ 정범의 행위가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인 점에 대한 인식, 즉 이른바 ‘정범의 고의’가 모두 있어야 하고(대법원 2005. 4. 29. 선고 2003도6056 판결 등), 위 정범의 고의의 대상에 해당하는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인 점’이란 ‘적용법조인 처벌규정의 구성요건으로서 정범이 실제로 행할 구체적 행위’를 말하는 것임이 자명하다.
위 관련법리를 각 종합컨대, 이 사건에서 피고인 A를 정범 B의 금융실명법 위반죄의 방조범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① B의 실행행위가 금융실명법 제6조 제1항, 제3조 제3항에 적시된 구성요건에 해당됨이 먼저 인정되어야 하고, ② A에게 방조범의 성립요건인 고의, 구체적으로는 B가 실제로 실행한 행위가 무엇인지 알고 의욕 내지 용인하였다는 정범의 고의와, 자신의 작위 또는 부작위로서 이를 용이케 한다는 방조의 고의가 모두 있었음이 각 증명되어야 한다.
나. 대상판결의 경우
(1) 정범 B의 실행행위의 구성요건 해당성
대상판결은 정범 B의 공소외 C에 대한 범행이 위 적용법조인 처벌규정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하여는 일체 설시함 없이 곧바로 피고인 A의 방조죄 성립여부를 판단하였다. 그런데 금융실명법 제6조 제1항, 제3조 제3항은 ‘불법재산 은닉 등에 준하는 탈법행위를 위하여’, ‘타인의 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이고, B의 C에 대한 행위는 그 자체로 형법 제347조 제1항 사기의 죄에 해당하는 바, 위 B와 C간에 이루어진 행위가 위 금융실명법 소정의 ‘불법재산 은닉 등 특수목적을 위하여’ 행하여진 ‘타인명의’의 ‘금융거래’라는 각 요건에 모두 부합하는지 여부는 문언해석 자체로도 검토여지가 있고 달리 유사 보이스피싱 사안의 정범을 동 규정으로 의율한 전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실정 하에 대상판결이 결과적으로 A의 (B의) 금융실명법 위반 방조죄를 인정하면서도 정범인 B의 실행행위의 구성요건 해당성에 대하여 일체 심리하지 않은 채 생략한 형국은 타당하지 않다고 보여 진다.
(2) 피고인 A의 방조범 성립요건으로서의 고의
살펴본바, 대상판결은 ① B가 A에게 계좌정보를 구득할 당시 했다는 말대로의 행위가 이루어진다면 이는 금융기관을 기망하여 차용금을 교부받는 사기의 죄에 해당하므로, A에게는 B의 탈법행위에 대한 고의가 있었고(이하 ‘사실상의 주위적 판단’), ② A의 사회적 지위·연령 등과 B가 한 말의 비정상성·비상식성 등에 비추어 볼 때 A는 B가 실제로는 A의 계좌정보를 가지고 다른 범죄행위를 행할 것임을 예견했거나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이하 ‘사실상의 예비적 판단’) 등을 제시하며, A의 범의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위 사실상의 주위적 판단에서 언급된 A의 인식은 정범 B가 A로부터 계좌정보를 교부받기 위하여 A를 기망한 허위의 사정으로서, B가 실제로 실행할 금융실명법 위반을 이루는 구성요건적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와는 질적으로 현저히 다른 이종의 것이고, 그 내용대로의 결과가 발생할 여지는 물론 실행착수 가능성마저 전혀 없었던 사정이다. 따라서 A가 인식한 내용 자체를 들어 그것을 ‘금융실명법 소정의 탈법행위’ 내지 ‘위법행위’로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판단은 B의 실행행위와의 관련성 내지 중첩성이나 실현의 개연성을 일체 인정할 수 없는, 오로지 B에 의하여 꾸며진 허위의 사정으로서 A의 내심 속에서만 머물러 있던 인식을 굳이 법률적으로 평가한 결과에 해당할 뿐이다. 이와 같은 A의 인식과 B의 실행행위 간의 구도를 이론상 방조의 구조로 평가하자면, 강학상의 ‘종범의 착오’ 중 ‘효과 없는 방조’로 볼 수 있을 것 인대, 이 경우의 방조자를 처벌하는 이른바 불능범의 처벌규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대상판결이 위 A의 내심의 인식에 불과한 사정을 법률적으로 평가한 다음 이를 명시적인 근거로 공소사실에 관한 A의 범의가 인정된다는 취지의 결론에 이른 논지는 방조범의 성립요건 중 정범의 고의에 관한 법리, 특히 그 고의를 이루는 인식의 대상을 오해 내지 혼동한 것이라고 아니 보기 어렵다.
또한 대상판결의 위 사실상의 예비적 판단부분에 대하여 보건대, ① 우선 동 설시부분은, ⓐ A가 인식했다고 주장하는 사정은 B의 구체적 실행행위와의 상이성에도 불구 그 인식내용 자체가 적용법조인 처벌규정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므로 결국 A의 범의가 인정된다는 설시부분 이후에 설시된 것으로서, ⓑ A는 사실 스스로 인식했다고 주장하는 사정대로 인식했을 리는 없고 적어도 B의 실제 실행행위를 예견했거나 예견할 수 있었다는 점을 명시한 것인 바, 결국 대상판결은 B의 행위에 대한 A의 구체적인 인식내용에 관하여 양립불가능한 사정들을 순서를 붙여 열거하고는 각 사정 중 어느 경우가 실체적 진실이더라도 모두 공소사실에 관한 A의 범의를 구성하는 사실로 인정된다는 형식, 즉 요증사실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영역에서 주위적·예비적 판단 내지 선택적 판단을 내린 구조로 읽히는데, 위와 같은 판단구조가 ‘사실’의 인정에 다른 사실의 존재에 관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의 확신을 요구하는 형사소송법 제307조에 비추어 허용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② 나아가 설령 대상판결이 언급한 A의 예견가능성 여하를 수긍하더라도, 그 예견의 대상인 내용과 인식의 정도가 B의 구체적인 실행행위에 대한 것으로서 A가 이를 의욕 내지 용인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판단에 이르지 않은 이상, 그 예견가능성 자체는 일견 과실의 요소에 불과 할 뿐이고, 적용법조인 처벌규정이나, 종범에 관한 형법규정은 과실방조를 처벌하지 않으므로, 결국 위와 같은 판단경과 역시 A의 유죄를 인정하기 위한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다. 소견
정식재판청구의 경우 제한적으로나마 사실상의 불이익금지의 원칙(형종변경의 금지)이 적용되고 있는 사정을 고려하면, 대상판결이 이 사건 공소사실에 대하여 유죄인정을 넘어 기록적인 증형에 이르기로 결정한 이상, 그 상세한 이유를 견고하게 설시했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대상판결은 그와 같은 일환에서 피고인 A의 인식사정 그 자체의 범죄 구성요건적 성격이나 비난가능성의 면면을 구체적으로 설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사재판에서 비난가능성 기타 유사한 법감정이 곧 유·무죄 판단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원칙하에 공소사실에 대한 판결이유를 음미할 경우, 방조범의 성립요건으로서 정범의 실행행위가 적용법조인 처벌규정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점, 방조의 고의에 관한 법리 중 인식의 대상에 관한 부분을 오해 내지 혼동한 것으로 보이는 점, 범의를 구성하는 구체적 사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영역을 주위적·예비적 판단 내지 선택적 판단의 구조로 취급한 논지가 어색한 점, 그 외 ‘예견가능성’ 에 대한 가정적 판단에 확정적인 ‘고의’의 지위를 부여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이 쉬이 수긍키 어려운 의문점들로 남는다. 생각건대 대상판결이 공소사실에 관한 A의 유죄를 인정하려면 최소한 ① 정범 B의 행위는 적용법조인 처벌규정의 구성요건에 해당함이 명백한 점 및 그 이유, ② ⓐ 피고인 A는 정범 B의 위 범죄행위를 예견할 수 있었으며, 그 예견의 정도는 고의로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성·개연성을 구비한 것이었기에 정범의 고의가 인정되는 점과 ⓑ A는 B의 위 행위를 용이케 한다는 방조의 고의 역시 있었던 점이 각 확신에 이르도록 인정된다는 판단의 경과를 설시하였어야 한다고 본다. 양형의 당부당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는다.
2020. 2. 17.
변호사 이승훈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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